1. 후기 신라의 모습
676년에 나당 전쟁이 끝나면서 신라는 당나라 군대를 몰아내고 대동강 이남 지역을 완전히 통일했습니다. 이후 9주 5소경을 설치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집사부의 장관인 시중의 권한이 강화되면서 왕권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신문왕은 녹읍을 폐지하고, 유학 교육을 위해 국학을 설립하였습니다. 또한, 기존의 진골 귀족 세력과 대립하던 6두품 출신의 득난 세력이 왕권과 결탁하면서 정치적으로 부각되었지만, 골품제는 여전히 유지되었고 진골 귀족들이 고위직을 독점하는 구조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9세기에 들어서면서 왕위 쟁탈전이 잦아지고, 중앙 정부가 무능해지면서 조세 수취에 반발한 농민 봉기가 전국에서 발생했습니다. 이로 인해 나라가 혼란스러워졌고, 골품제의 폐단도 심화되었습니다. 이때 각 지방의 유력한 호족들이 성장하여 실권을 장악하고, 스스로 장군이라 칭하면서 조정으로부터 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대동강 이남 지역의 통일로 인해 전쟁이 줄어들면서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으며, 특히 불교문화가 더욱 융성하였습니다.
2. 신라의 삼국 통일 과정
1) 삼국의 상황
고구려는 수나라와 네 차례의 전쟁을 치르면서 수나라의 국력이 약해졌고, 결국 이연의 반란으로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섰습니다. 당나라가 새롭게 등장하자, 고구려는 당나라와 친선을 맺으려 했지만, 이를 반대한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이때 신라는 백제와의 대야성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김춘추의 입지가 위기에 처했습니다. 김춘추는 외교적으로 해결하려고 고구려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지만 연개소문이 거절하였고, 일본에도 도움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했습니다. 결국 김춘추는 당나라와 손을 잡아 나당 동맹을 체결하였습니다.
2) 백제의 멸망과 부흥 운동
황산벌 전투에서 김유신이 승리하면서 백제가 멸망하였습니다. (660) 이후 당나라는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부여융을 웅진 도독으로 임명하였습니다.
백제 멸망 후 백제 부흥 운동이 일어났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습니다.
- 임존성 : 흑치상지는 당에 투항하고, 지수신은 고구려로 도망쳤습니다.
- 주류성 : 복신, 도침, 부여풍이 주도했으나,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부여풍이 다시 복신을 죽인 후 고구려로 도망쳤습니다.
- 백강 전투 (663년) : 백제와 일본 연합군이 나당 연합군과 싸웠으나 패배하였습니다.
3) 고구려의 멸망과 부흥 운동
- 신라에서는 무열왕(김춘추)이 사망하고 문무왕이 즉위하였습니다. 당나라가 신라에 계림도독부를 설치하면서 신라는 당나라에 대한 불만을 가지게 되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취리산 회맹이 열리기도 했습니다.
- 한편,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이 사망한 후 내부 분열이 발생하였습니다. 이 틈을 타 당나라는 668년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습니다.
-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 부흥 운동이 일어났는데, 백제의 부흥 운동과는 다른 양상을 보였습니다. 문무왕은 부흥 운동을 하는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임명하고, 신라의 지원을 받아 674년 보덕국을 세우게 하였습니다.
- 문무왕이 이를 지원한 이유는 고구려 세력을 이용하여 당나라를 한반도에서 몰아내기 위해서였습니다.
4) 나당 전쟁과 삼국 통일
675년 매소성 전투에서 신라는 당나라 군에 이기면서 나당 전쟁의 주도권을 잡았습니다. 이어 676년 기벌포 전투에서 당나라를 완전히 몰아내고, 한반도에서 당나라의 세력을 축출하였습니다.
이로써 신라는 대동강 이남 지역을 완전히 차지하며 삼국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3. 삼국 통일의 결과
신라는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한반도 남부를 독자적으로 통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 북부와 만주는 당나라가 차지하였으며, 이는 이후 발해의 건국으로 이어졌습니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중앙집권 체제를 더욱 강화하였으며, 경제와 문화의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귀족 세력의 강화와 지방 호족의 성장으로 인해 점차 왕권이 약화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4. 호족
1) 호족의 등장
신라 말기, 농민 봉기가 각지에서 발생하면서 중앙 정부의 통제가 약화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몰락한 중앙 귀족, 무역으로 재산과 군사력을 키운 세력, 지방 군진 세력, 촌주 출신 등이 각 지방에서 세력을 키우며 호족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이들은 성을 쌓고 군대를 보유하면서 스스로 성주 혹은 장군이라 칭하며, 지방의 행정·군사·경제적 지배권을 행사하였습니다.
호족 세력은 중앙에서 배제된 6두품 출신 학자들의 지지를 받으며, 신라의 골품제를 비판하고 사회 개혁을 추구하였습니다. 이들은 후삼국 시대를 형성하는 중요한 정치·사상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2) 호족의 성장
8세기 후반부터 중앙 귀족들 간의 권력 투쟁이 심화되었고,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호족 세력이 더욱 성장하였습니다.
진골 귀족들은 녹읍제를 부활시키고, 경제력을 바탕으로 사병을 거느리며 권력 다툼을 벌였습니다. 이에 따라 왕권이 약화되고, 상대등의 권력이 강해졌습니다. 중앙 귀족들은 사치와 향락에 빠졌고, 농민들의 세금 부담이 가중되면서 토지를 잃은 농민들이 노비나 도적이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지방에서 반란이 빈번하게 발생하였습니다.
또한, 중앙에서 배제된 지방 세력들은 해상 무역을 통해 활동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당나라와 일본과의 무역이 활발해졌습니다. 신라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지역에는 신라방과 신라소 같은 행정기관이 생겼으며, 장보고가 건설한 법화원 같은 사원도 세워졌습니다.
당나라의 지방 통제력이 약해지면서 해적 활동이 심해졌고, 이를 방어하기 위해 청해진(완도), 당성진(남양), 혈구진(강화) 등의 군진이 설치되었습니다. 그중 장보고가 828년에 설치한 청해진이 가장 대표적인 군진이었습니다. 장보고는 해적을 방어하는 한편 국제 무역을 통해 황해의 실력자로 성장하였고, 중앙 정치에도 개입하였습니다.
3) 정치 변동
9세기 이후, 신라 사회는 크게 변화하였습니다. 대상인(큰 상인)의 등장과 대토지 소유 확대가 진행되었고, 지방의 토호와 귀족들은 점차 대지주로 성장하였습니다. 또한, 지방 촌주들도 토지를 확대하며 세력을 키웠고, 사원들도 면세 특권을 이용해 농장을 늘려갔습니다.
한편,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6두품 학자들과 선종 승려들은 신라의 골품제를 비판하며 새로운 정치 이념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중앙에서 배제된 이들은 지방의 호족들과 연계하여 사회 개혁을 추진하거나 은둔하였습니다.
결국, 중앙 집권 체제가 붕괴되면서 지방 호족 세력은 더욱 강해졌고, 후삼국 시대를 여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5. 신라의 몰락
신라는 삼국 통일 후 안정된 체제를 유지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중앙 정부의 힘이 약해지고 지방 호족들이 성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왕위 계승 문제와 귀족 간의 권력 다툼이 지속되면서 신라는 점차 혼란에 빠졌습니다. 결국 9세기 후반부터 신라는 후삼국 시대로 접어들며, 고려의 등장과 함께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삼국 통일 과정은 신라가 외교, 군사 전략, 내부 개혁을 통해 이뤄낸 역사적 성과였습니다. 그러나 당나라와의 전쟁을 통해 어렵게 지켜낸 독립이었으며, 이후 내부적 문제로 인해 다시금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2025.02.24 - [한국사/통일신라] - 통일신라의 역대 왕들의 업적
통일신라의 역대 왕들의 업적
1. 통일신라 역대 왕통일 신라부터는 진골 왕족이 왕위를 계승합니다. 29대 무열왕 ~ 36대 혜공왕까지 중대, 37대 선덕왕 ~ 56대 경순왕까지 하대로 시대를 구분합니다.(중대)29대 대종 무열왕654 ~ 661
trillion91.com
'한국사 > 통일신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통일신라의 문화사 (0) | 2025.02.27 |
---|---|
통일신라의 정치사와 경제사 (0) | 2025.02.25 |
통일신라의 역대 왕들의 업적 (0) | 2025.02.24 |